<상상하다>를 한자로 쓰면 <想像>이고, 독일어로 쓰면 einbilden이다. 독일어의 Bild가 그림을 의미하니까 독일어의 <상상하다>는 <그림을 그리다>는 의미인 듯하다. 한편 <想像>의 뜻을 새겨보면 <想>이 <생각하다>이고 <像>은 <형상>을 의미하니 상상이란 곧 형상을 생각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형상은 그림과 통하므로 독일어와 한자에서 상상은 그 어원이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즉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상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 <想像>의 어원에는 독일어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는 독특한 것이 들어 있다. 바로 <像>이다. 형상은 형상인데 그냥 일반적인 형상이 아니라 사람(人)과 코끼리(象)와 관련된 형상이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로는 <想像>이란 사람 중에서도 특히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머리 속에 무언가를 그려내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등을 쓸어보는가 하면 코를 잡아 늘여 보기도 하면서 장님은 코끼리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손바닥과 손가락에 와 닿는 무정형의 느낌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장님은 과감하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 딱히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없다. 단순히 코끼리 앞에서 줄행랑을 놓지 않는 한, 도대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촉각만으로 시각적 형태를 용감하게 그려내야 한다. 쿵쿵, 육중한 느낌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때로는 공포를 자아내기도 하면서 자기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저 미지의 동물, 두려움의 대상인 듯하지만 알고 나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저 동물을 비로소 만나는 방법, 이 방법이 바로 想像이다.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져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두렵다. 그래서 겁난다. 그러나 만져 보아야 한다. 만져보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상상할 수 없다. 촉각의 느낌이 제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희미하나마 그 촉각을 실마리로 삼지 않으면 도대체가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기둥 모양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코끼리와 소중한 만남을 이루었으니까.

상상이란 이미 견고한 형태를 가지고서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모사가 아니다. 그런 것은 벌써 가능함이 입증된 것이요 더 나아가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상상이란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임에도 이 세상에 희미한 숨소리를 내며 엄존하는 것을 비로소 만나 어렴풋하게나마 만져보고 그려내는 것이다.

상상의 하나가 불가능 속에 갇혀 있어 존재의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밖의 우리와의 소중한 만남이라면, 그 둘은 이 만남을 그림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그리움이 있다. 사무치는 그리움 없이는 그림도 없다. 그림과 그리움의 말뿌리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가능에 갇힌 존재에 대한 상상은 만남에서 시작되는 한에서 나눔이다. 하나의 만남에 두 개의 상상이 있다. 나에 못지않게 내 밖의 또다른 나인 너 역시 나와의 만남을 통해 상상한다. 나는 너에게 코끼리다. 만남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모태로 하여 나와 너의 서로 다른 그리움이 갈라져 나오고 여기서 다시 나와 너의 서로 다른 그림이 자라 나온다. 마치 같은 수정란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독자적인 두 세포로 분열되듯이, 또 본래 하나였던 영혼이 서로 그리움을 간직한 두 도플갱어로 나뉘듯이, 아니 로스코의 저 하나였던 캔버스가 서로를 영원히 갈망하는 두 화면으로 결연히 분할되듯이. 상상이 수행하는 나눔의 과정은 만남을 매개로 한 독립적인 두 생명의 재탄생과정인 것이다.

이런 뜻의 나눔이란 내가 가진 것을 우월감 속에서 내 밖의 나에게 주는 일방 시혜적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만남을 그리움 속에서 저만의 두 그림으로 키워내는 쌍방 독립적 과정이요, 한낱 파이의 나눔이 아니라 만남의 나눔이며 아니 차라리 만남의 키움이다.

어디선가 코끼리의 불가능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을 꿈꾼다. 그를 만나려 한다. 상상이 시작되고 나눔이 시작된다. 하지만 가진 게 많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어른의 상상력이 아니라 가진 건 없지만 설레임에 두근거리고 그리움에 사무친 어린 아이와 연인의 상상력으로! 바로 나눔의 상상력으로!


Mark Rothko, Orange and Yellow, 1956.

Posted by 맞울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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